PIFF Day 8 - 나초 세르다, 버려진 아이들(The Abandoned)

오늘은 영화 상영이 8시 반이어서 훨씬 여유가 있다 싶어서 느릿느릿 나갔다...가 영화 시작 3분 전에 상영관에 도착했다-_- 오늘 본 영화는 나초 세르다 감독의 공포영화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PIFF 카탈로그에서 처음 봤을 때는 완전 '영화제용' 공포 영화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러쿵 저러쿵 초자연현상이 일어나도, 비교적 전개는 느리고 정적이며 고어 장면 따위는 없고 끝에서는 왠지 휴머니즘적인 결말로 따뜻하게 마무리되는... 그런 영화 있잖은가. 조금 있다 이야기하겠지만, 그건 완전 착각이었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감독은 에스파냐 출신이고, 배경은 러시아(실제 촬영은 불가리아에서 했단다)이며, 배우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희한한 다국적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은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러시아"의 드넓은(그리고 왠지 불길한) 풍경이 펼쳐지며, 여자의 목소리가 자기 어머니와의 소원한 관계, 그리고 어머니의 어린 시절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를 독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곧이어 1960년대의 어느 날 트럭 한 대가 미친 듯이 질주하는 씬으로 시작한다. 무언가로부터 쫓기는 것처럼 급히 달리던 트럭은 이내 어느 농가에 멈춘다. 농가의 식구들이 트럭 문을 열었을 때 운전중이던 여자는 부상으로 숨을 거둔 뒤였는데, 옆에는 한 쌍의 쌍둥이 간난애가 울고 있다.

40년이 흐른 뒤 영화 제작자인 마리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 러시아로 돌아온다. 입양기관 담당자인 미샤린이라는 남자는 어머니가 러시아의 산골에 농장 하나를 유산으로 남겼다고 알려주고 그녀는 혹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곳을 방문한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진 뒤였고, 집 안으로 발을 들인 그녀는 40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채 폐허가 되어 방치되어 있었다는 그곳에서 기이한 기척을 느낀다. 집안을 헤매던 그녀는 익사한 자신의 모습을 한 유령과 마주치게 되고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작정 집을 빠져나와 숲속을 달리다 강에 빠지고 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니콜라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알고보니 그는 40년 전 헤어진 자신의 쌍둥이 형제로,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관한 소식을 쫓아서 이 집에 왔다고 한다. 집 안을 탐사하는 그들 앞에 40년 전 참극의 환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41번째 생일날 여기 모인 게 우연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귀신들린 집'이라는 그야말로 닳고 닳은 소재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 사실, 공포영화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클리셰의 재활용률(?)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이 '귀신들린 집'처럼 많이 사용된 소재도 아마 보기 드물 것이다.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로버트 와이즈의 'The Haunting'부터, 최근작들 중에서 비교적 인상적이었던 브래드 앤더슨의 'Session 9',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듣보잡 호러물들까지 내가 보아왔던 여러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클리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집' 그 자체이다. 집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면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강으로 고립된 채 40년 동안 버려져 폐허가 된 농장을 꽤 제대로 살려내고 있다. 썩어들어가는 목재들, 하얗게 핀 곰팡이, 두껍게 쌓인 먼지와 거미줄 등등, 그리고 허벅지까지 차는 흙탕물이 고인 지하실의 수로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문제는 반을 먹고 들어간 이후부터 이야기가 너무 안이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집의 분위기만 해도 충분히 압도적인데, 여기서 감독은 무리하게 스릴러의 요소를 끌고 들어온다.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래키기, 등뒤에서 어깨에 손 얹기, 옷장안에 숨기 같은 좀 쌈마이 같은 효과를 사용하는데, 잘 알다시피 이건 스릴(thrill)이지 정말 깊이 있는 공포(horror)가 아니다. 집의 분위기 말고도, 영화 'Dead End'에서 써먹은 것 같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이 끝없는 절망의 상태가 계속되는' 연옥의 모티프도 인용되고 있지만, 이런 싸구려 같은 효과들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도 못하고 죽어 버린다.

그래도 제법 재미있기는 했다. 나도 몇 군데에서는 기겁을 하기도 했으니까.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감독인 나초 세르다에게는 첫 번째 장편영화라고 하는데, 다음 번에는 좀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 돼지가 시체를 뜯어먹는 장면에서 효과음이 끝장이었다. 우걱우걱쩝쩝꾸룩꾸룩.

by 애쉬블레스 | 2007/10/13 21:34 | With or Without You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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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스페이스오딧세이 at 2007/10/17 21:53
SF전문출판사 '기적의책'출판사가 홈페이지를 개설했습니다. 둘러보시고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주소는 http://www.mbpress.co.kr/zbxe/ 입니다~

(광고글 올려 죄송합니다. 한번만 봐주세요...ㅠ_ㅜ)
Commented by 애쉬블레스 at 2007/10/18 22:15
스페이스오딧세이/ 괜찮습니다. 팬덤 출판사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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