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조니 뎁,헬레나 본햄 카터,알란 릭맨 / 팀 버튼
나의 점수 : ★★★★











생각지도 못하게 스위니 토드를 보게 되었다. 면도칼로 목 긋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동행했던 여자분들은 눈을 가렸다. 나도 처음 살인 장면은 약간 께름칙했는데, 계속 보니까 어느 순간 역치를 뛰어넘자 그때부터 무덤덤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떠올랐다. 같은 뮤지컬 영화라서 그랬다기보다는 듀나님께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별점을 달면서 언급하셨던 '주제와 표현방식의 불일치에서 오는 기묘한 부조화' 같은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영화는 거의 시종일관 잔뜩 찌푸린 하늘과 매연, 폐수와 피, 길게 베인 목, 절단된 신체 등등의 어두운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와중에도 우스꽝스러운 대사와 몸짓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자칭 이발사들의 왕 피렐리의 엉터리 이탈리아어(인수위식으로 쓰자면 ㄹㄹㄹㄹ뤠에에에디이이이~)나, 러빗 부인의 멋대로 상상 장면 등등.

하지만 결말로 치달을수록 점점 이런 부조화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진지한 고대 그리스 비극 같은 서사가 남는다. 특히 결말 부분을 지켜보면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떠오른 건 나뿐이었을까? 원래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의 파멸은 대개 운명이나 신 같은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많이 끼어드는 법인데, '스위니 토드' 결말 역시 언뜻 얄궃은 운명의 장난이 비극의 원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토드와 러빗이 동업관계를 형성하여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마음대로 해치면서 복수는 처음 동기에서 어긋나 사적 심판의 성격을 띄게 되고, 그들도 어느새 자신들이 혐오하던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구멍"인 런던의 일부가 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점에서는, 등장인물의 성격적 결함이 파멸의 씨앗이 되는 셰익스피어 비극 같다고나 할까. 중반부의 "모두 죽어 마땅해. 너와 나까지도!(All deserves to die... Even you and me!)"라고 토드가 러빗에게 부르는 노래는 일종의 암시로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스위니 토드'는 전형적인 팀 버튼의 영화의 태도와는 약간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너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 같다. 어느 게시판의 모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 삐뚤어졌잖아!' 조금 더 삐딱하게 나가도 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듀나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연극과 이를 각색한 뮤지컬의 결말에는 조금 더 긴 후일담 같은 게 있는 듯한데, 영화에서는 너무 서둘러 마무리 지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게 본 영화였다. 다만 중반부에 전개 속도가 느려지면서 약간 지루한 게 아쉽다.

PS. 헬레나 본햄 카터는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소위 '예쁜' 배역을 잘 안 맡는 건가? 내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혹성탈출'의 원숭이(...)였는데 이번에도 또 부시시한 배역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는구나.
by 애쉬블레스 | 2008/01/30 22:11 | With or Without You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ashbless.egloos.com/tb/172657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파인로 at 2008/01/30 22:57
조안나가 자신의 처지를 길게 한탄한 직후 안소니가 부른 조안나 타령은 확실히 늘어진다는 느낌이 강했지요. 그리스 비극과 많이 닮았다는 점에는 두 팔 번쩍 들어 공감합니다. 거지 아줌마(아직 안 보신 분도 계실테니 ^^;)가 너무 쉽게 슥삭 당했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던데, 오히려 그래서 더 비극적이지 않았나요?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에이, 평소처럼 죽이고 말지 뭐. 하는 표정으로 처리하는 스위니 토드가 참 불쌍하기도 하고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가요? 저는 오히려 개인에게 복수하려다 결국 세상을 저주하면서 징벌자를 자처하는 스위니 토드를 보면서 전형적인 연쇄 살인마의 구질구질한 철학을 떠올렸더랬죠.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찬동하는 러빗 부인 또한 구질구질했고요. 저 둘이 투톱이라서 비윤리적인 측면이 가려진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삐뚤어지지 않았다는 점에는 공감하고요. 어쩐지 어둡고 음침하고 스산하지만, 삐뚤어졌다고 하기엔 영화 전체 분위기가 너무 차분했어요. 가끔 심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요. 결말은 좀 그랬지만 삐뚤어진 분위기 조성은 [슬리피 할로우]가 뛰어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좀 아쉬웠던 게, 사족이라는 느낌이 들어도 좋으니 안소니와 조안나의 뒷 이야기가 있었으면 했죠. 물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보단 팀 버튼답게 조안나가 바깥 세상으로 탈출하기 위해 안소니를 이용해먹은 것으로 드러나서, 결정적인 순간에 안소니를 배신하고 거기에 분노한 안소니가 조안나를 죽인다던지(아아, 빈곤한 상상력) 말이죠. 이쪽 커플은 영 심심했어요.

말이 길었군요; 여튼 보고 와서 이런저런 감상문을 읽었는데 어디서 읽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공감가는 말이 적혀있더군요. "복수는 금자씨 말처럼 식었을 때 해야 맛있다. 그런데 스위니 토드는 너무 뜨거울 때 먹어서 입천장을 데고 말았다."(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애쉬블레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요 ^^
Commented by 애쉬블레스 at 2008/02/05 22:55
파인로/ 에... 제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한 것은 캐릭터의 성격이 아니라 캐릭터를 보는 시선의 차원에서였습니다. 제 글이 약간 모호했나보군요^^;

본문에도 있지만 조안나와 안소니는 뮤지컬이나 연극에 비해 비중이 대폭 축소된 거라고 그러네요. 저도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부분인 것 같아 많이 아쉬웠습니다. 특히 결말에서 조안나가 자신의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두눈으로 목도했다면 비극이 더욱 완전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어요(너무 가학적인가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