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전직 뉴위어도의 고백
J. R. R. 톨킨이 판타지의 거목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3부작이 50년대 중반 발표된 이후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그 그림자와 뿌리가 점점 더 길고 넓게 뻗어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소위 톨킨풍(Tolkeinesque)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후대 작가들의 지속된 상업적 성공과, D&D로 대표되는 롤플레잉 게임 산업의 번영, 그리고 피터 잭슨의 영화가 공전의 흥행을 기록하는 것까지. 너무나 거대한 나무인 탓에 주위의 삼림들이 왜소하게 보일 지경이다. 한편 그동안 SF는 여러 차례에 걸친 변화를 겪었다. 50년대 이후, 과학소설의 토대를 이루는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급격한 발전, 정치사회적 측면에서의 격동, 그리고 특히 현대 주류문학으로부터의 자극 같은 장르 외부로부터의 요인이 과학소설을 뿌리부터 뒤흔들었고, 이는 60년대의 뉴웨이브와 80년대의 사이버펑크로 만개했다. 그러면 두 번의 운동이 SF를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판타지 월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판타지쪽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변화가 없었다. 톨킨과 루이스가 이차 세계의 방법론을 확고히 한 이후, 여러 하위 장르들이 명멸을 거듭했다. 어떤 작가들은 과거의 전통에 물과 비료를 뿌리며 가꾸었고, 어떤 작가들은 거기에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SF에서의 뉴웨이브와 사이버펑크처럼 장르의 질적 개혁을 노리는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여전히 판타지는 톨킨의 그림자 속에서 안온한 꿈에 잠겨 있었다.
2003년 4월 29일, 호러/다크 판타지 성향 작품들이 주로 실리던 영국 잡지 더 서드 얼터너티브(The 3rd Alternative, 지금은 블랙 스태틱(Black Static)으로 개명)의 온라인 게시판에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 도발적인 주장도 없는 몇 가지 질문들의 조합에 불과한 이 글 아래로 수많은 SF/판타지 작가와 평론가, 독자들이 달려들어 몇달동안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글쓴이는 영국의 소설가인 M. 존 해리슨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뉴위어드. 어떤 작가들이 쓰는가? 이것은 무엇인가? 실체는 있나? 새롭기는 한 건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2의 뉴웨이브'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구호인가? 그냥 잡탕소설이라고 하면 안 되나? 늘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의 의견이 듣고 싶다."
이들이 장르의 전면적인 질적 개혁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20세기 초 펄프 작가들의 영향 아래 있음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면서 톨킨을 모방하는 주류 판타지 소설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한 것만은 분명하다.(각주 2) 그 과정에서, 이들은 초기 펄프 소설들의 특징인, SF/판타지/호러 등 하위장르로의 분화가 분명하게 이루어지기 이전의 역동성까지 고스란히 되살려내었다. 이들의 작품 대부분은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날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차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판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세계를 구성하는 각종 물질과 현상의 이면에 깔린 법칙에 체계적,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는 과학소설을 방불케 한다. 게다가 기저에 깔린,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퇴폐적이며 기괴한 분위기는 온전히 공포소설 특유의 것이다.
"동화에 관한 자신의 에세이에서, 톨킨은 위안(consolation)이 동화- 지금은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위안을 주는 판타지라니,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소리다. 독자가 위안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작품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책의 목적이 본질적으로 위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도전하거나 전복시키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이는 안정지향적이며, 미학적으로 완전히 경직된 사고방식이다. 난 그런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판타지는 위안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판타지의 미학을 위안에 저항하는 데 사용한 초현실주의야말로 최고의 판타지다."(각주 3)
하지만 영화와 만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확산되며 동시대의 문화적 현상으로 발전한 사이버펑크와 달리, 뉴위어드는 대중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둘 다 본질적으로는 장르의 질적 혁신을 지향한 내적 움직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이버펑크가 분명한 주장과 방향성을 제시한 명백한 운동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뉴위어드는 연속성과 차별성은 갖추되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던 결과(각주 4), 그 파급효과가 상대적으로 미미하여 영향력이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뉴위어드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작풍은 제각각인데,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만한 이데올로그(각주 5)나 선언문(menifesto)(각주 6) 같은 것도 없었다. 더욱이 사이버펑크의 확산의 배경에 깔린 인터넷의 보급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진행이라는, 공시적(共時的) 압력으로서의 과학기술 및 정치사회적 배경도 부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뉴위어드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공산이 컸다. 초창기부터 뉴위어드로 자처했던 차이나 미에빌의 회고에 주목하자. "뉴위어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굉장히 답답하다. 뉴위어드가 쓸모 없다면, 어설픈 분류체계라면- 좋다, 그 점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보자. 하지만 사람들은 어쨌거나 분류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가 늘 무언가를 분류하려 든다는 점에서, 그런 태도는 다소 이상하다. 이건 지질학에서 딱지를 붙이고 '이것은 이런 종류의 암석이다'라고 하면 끝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문학적 분류는 일종의 도구니까 쓸모가 있는 한 써먹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뉴위어드가 애매모호한 진실 같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던 거다. 그것이 자기 패러디를 반복하면서 무의미해지는 시점이 오자, 그만둔 거고.
"뉴위어드는, 과학소설과 판타지의 요소를 결합시킨 배경에 복잡한 현실 세계의 모형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전통적인 판타지 세계에 대한 낭만화된 관념을 뒤엎으려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차 세계를 다룬 소설의 한 형태이다. 여기에 뉴웨이브나 그 동시대 작가들(은 물론 머빈 피크나 프랑스/영국의 퇴폐주의 같은 선구자들)에게서 받은 영향은 물론, 어조나 문체, 효과를 위해 초현실적 공포소설의 정서적 특성들도 은연중에 들어가 있다. 뉴위어드는 비록 변형된 상태일지언정 현대 세계를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지만, 항상 공공연하게 정치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현대 세계에 대한 자각의 한 형태로서, 뉴위어드는 상상력을 고무하기 위하여 "기괴함에 대한 경도(傾倒)"에 의지하나, 이는 이를테면 늪지대에 세워진 흉가나 남극의 동굴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런 작가의 경도(혹은 신뢰)는 다양한 형태를 띄는데, 심지어 일부는 작품의 실재감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도 차용한다."(각주 8) 뉴위어드는 지금까지 SF에서나 가능했던, 장르의 문법을 전복시키려는 급진적인 움직임을 판타지에서 재현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였다. 비록 탈정치적인 전개로 말미암아 운동으로서의 결집력과 방향성 부족으로 그 성과가 장르 외부까지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채 남겨져 있던 판타지의 또 다른 혈통을 복권시킴으로써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이 장르에 역동성을 불어넣었으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하위 장르가 될지도 모를 양식을 잉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뉴위어드는 죽었다. 다음 위어드여, 번영하라.New Weird is dead. Long live the Next Weird."라는, 다소 씁쓸하게 들리는 밴더미어의 결어에서는, 한편으로 뉴위어드의 성과와 유산이 언젠가 미래의 새 "운동"에 그대로 계승되리라는 자긍심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 특히 등장인물을 구축하는 솜씨가 일취월장한 것이 눈에 띄는데, 야가렉이 그 좋은 예다. 그는 처음에 가짜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가루다 행세를 하다가, 서서히 도시 생활에 적응하며 가짜 날개를 버린다. 갈수록 가루다로서의 자의식을 잃어가면서도, 그는 하늘을 날고자 하는 열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 채 도시와 사막 사이에서 번민한다. 하지만 마침내 원치 않게도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신을 가루다로 규정짓는 마지막 증거인 깃털을 자기 손으로 모두 뽑아버림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고 도시 속으로 스며든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열망으로 시작하여 결국 전혀 다른 존재, 뉴크로부존의 일부로 거듭나는 것으로 끝난 야가렉의 여정에서, 작품 전체에 걸쳐 등장인물이 겪는 내면적 변화는 인물의 외면적 행동 뿐만 아니라 전이(轉移)라는 작품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와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정치성을 표출하는 방식도 훨씬 매끄러워졌다. 경향 문학을 방불케 할 정도의 서툴고 미숙한 정치적 입장 표명으로("나는... 시민쥐다.") 개운치 못한 끝맛을 남긴 전작과는 달리, 본작에서는 정치적 메시지가 작품 전면에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다. 대신 작가의 정치성은, 실전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량학살무기를 사용하고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군부와, 생물무기 프로젝트를 사영화(私營化)하고 범죄집단과의 공조도 서슴치 않는 타락한 시정부, 그리고 그 폭정 아래서 신음하는 뉴크로부존의 인민들에 대한 묘사에 자연스럽게 깊이 스며들어 있다. 특히 자본가-군부-정치가의 연합으로 직조된 뉴크로부존의 권력 지도를 정치학자 C. 라이트 밀즈가 '파워 엘리트Power Elite'에서 지적한 철의 삼각동맹처럼 묘사한 데 덧붙여, 자본가 집단이 재력으로 시정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설정한 대목은 언뜻 최근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인한 시장의 지배 현상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미에빌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작품이 현실 세계의 정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각주 9), 아무리 작품 속에 현실 세계와 유사한 요소들이 등장하더라도 이를 어디까지나 바스락 세계관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작가가 현실 세계로부터 차용(착취?)한 것으로 보는 쪽이 옳은 듯하다. 다시 말해, 독자가 수록에 투하된 토크 폭탄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원자폭탄을, 잇달아 정복 전쟁을 일으키며 제국주의적 확장에 나선 뉴크로부존을 통해 미국을 연상하게 되더라도, 본작이 현실 세계의 근현대사를 은유하거나 풍자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의미이다. 미에빌이 톨킨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렇게 '현실에 대한 은유'로서 작동하는 판타지를 거부했다는 점(각주 10)에서 두 사람의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건 왠지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각주 1) 현재 게시물은 작가이자 편집자, 평론가인 캐스린 크레이머의 블로그에 옮겨져 있다 (http://www.kathryncramer.com/kathryn_cramer/new_weird/) 각주 2) 대개 뉴위어드 계통의 작가들은 톨킨에 대해 비판적이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제프 밴더미어는 톨킨의 공과(功過)를 평가하는 데 있어 굉장히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Locus October 2002, 'Jeff VanderMeer Interview: Precious Ambergris') 각주 3) Locus March 2002, 'China Mieville interview: Messing with Fantasy' 각주 4) 2003년 논쟁에서 iotar라는 유저가 "뉴위어드는 운동이 아니라 논쟁이다"라고 정의한 것은 아주 타당한 견해다. 각주 5) 그럼에도 미에빌-밴더미어를 과거 뉴웨이브에서의 발라드-무어콕이나 사이버펑크의 깁슨-스털링에 빗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각주 6) "뉴위어드는 평론가들에게나 유용하지 작가들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주제이다. 뉴위어드 선언처럼 어이없고 쓸데없는 짓도 없을 것이다." - 마이클 시스코 각주 7) Locus November 2006, 'China Mieville interview: Fabular Logic' 각주 8) VanderMeer, Anne & Jeff The New Weird(Tachyon Publications): 16 각주 9) China Mieville: RevolutionSF interview (http://www.revolutionsf.com/article.php?id=2391) 각주 10) 몸소 참전했던 1차 세계대전의 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흔적이 '반지의 제왕'에 남아 있음에도, 톨킨은 출판 이후 '반지의 제왕'을 어떤 형태이든지 알레고리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독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http://en.wikipedia.org/wiki/The_Lord_of_the_Rings#Re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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