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 해설

해설/ 전직 뉴위어도의 고백


1. 톨킨 이후

J. R. R. 톨킨이 판타지의 거목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3부작이 50년대 중반 발표된 이후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그 그림자와 뿌리가 점점 더 길고 넓게 뻗어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소위 톨킨풍(Tolkeinesque)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후대 작가들의 지속된 상업적 성공과, D&D로 대표되는 롤플레잉 게임 산업의 번영, 그리고 피터 잭슨의 영화가 공전의 흥행을 기록하는 것까지. 너무나 거대한 나무인 탓에 주위의 삼림들이 왜소하게 보일 지경이다.

한편 그동안 SF는 여러 차례에 걸친 변화를 겪었다. 50년대 이후, 과학소설의 토대를 이루는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급격한 발전, 정치사회적 측면에서의 격동, 그리고 특히 현대 주류문학으로부터의 자극 같은 장르 외부로부터의 요인이 과학소설을 뿌리부터 뒤흔들었고, 이는 60년대의 뉴웨이브와 80년대의 사이버펑크로 만개했다. 그러면 두 번의 운동이 SF를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판타지 월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판타지쪽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변화가 없었다. 톨킨과 루이스가 이차 세계의 방법론을 확고히 한 이후, 여러 하위 장르들이 명멸을 거듭했다. 어떤 작가들은 과거의 전통에 물과 비료를 뿌리며 가꾸었고, 어떤 작가들은 거기에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SF에서의 뉴웨이브와 사이버펑크처럼 장르의 질적 개혁을 노리는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여전히 판타지는 톨킨의 그림자 속에서 안온한 꿈에 잠겨 있었다.


2. 뉴위어드(New Weird): circa 2000-(2008?)

2003년 4월 29일, 호러/다크 판타지 성향 작품들이 주로 실리던 영국 잡지 더 서드 얼터너티브(The 3rd Alternative, 지금은 블랙 스태틱(Black Static)으로 개명)의 온라인 게시판에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 도발적인 주장도 없는 몇 가지 질문들의 조합에 불과한 이 글 아래로 수많은 SF/판타지 작가와 평론가, 독자들이 달려들어 몇달동안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글쓴이는 영국의 소설가인 M. 존 해리슨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뉴위어드. 어떤 작가들이 쓰는가? 이것은 무엇인가? 실체는 있나? 새롭기는 한 건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2의 뉴웨이브'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구호인가? 그냥 잡탕소설이라고 하면 안 되나? 늘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의 의견이 듣고 싶다."
"The New Weird. Who does it ? What is it ? Is it even anything ? Is it even New ? Is it, as some think, not only a better slogan than The Next Wave, but also incalculably more fun to do ? Should we just call it Pick'n'Mix instead ? As ever, *your* views are the views we want to hear-"(각주 1)

뉴위어드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바로 이 논쟁을 통해서였다. 논쟁 자체는 뉴위어드의 정의보다 그 성격과 방향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는데, 이는 초기부터 참가자들이 뉴위어드의 개념이나 문학적 기원에 관해 상당 부분 의견 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을 지칭하는 "뉴"위어드라는 단어는 이미 이전에 "올드"위어드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기서 "올드"위어드란 다름 아닌 클라크 애시튼 스미스, 로버트 E. 하워드, 그리고 특히 H. P. 러브크래프트를 위시한 1930년대 펄프 잡지 작가들이며, '위어드'란 단어도 그들이 자주 기고하던 펄프 잡지인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들이 장르의 전면적인 질적 개혁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20세기 초 펄프 작가들의 영향 아래 있음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면서 톨킨을 모방하는 주류 판타지 소설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한 것만은 분명하다.(각주 2) 그 과정에서, 이들은 초기 펄프 소설들의 특징인, SF/판타지/호러 등 하위장르로의 분화가 분명하게 이루어지기 이전의 역동성까지 고스란히 되살려내었다. 이들의 작품 대부분은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날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차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판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세계를 구성하는 각종 물질과 현상의 이면에 깔린 법칙에 체계적,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는 과학소설을 방불케 한다. 게다가 기저에 깔린,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퇴폐적이며 기괴한 분위기는 온전히 공포소설 특유의 것이다.

특히 공포소설과의 근연성은 뉴위어드를 지금까지의 사이언스 판타지와 분명히 구별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뉴위어드의 기저에 위어드 테일즈를 비롯한 초기 펄프 소설 시기 공포-괴기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 무자비하리만치 잔인하고 노골적인 유혈 묘사나, 왜곡된 형태로 재조립된 생체에 대한 기호는 제프 밴더미어가 지적한 대로 1980년대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Books of Blood'과 소위 스플래터펑크(splatterpunk)라고 부르는 일군의 새로운 공포소설들에게서 힘입은 바 크다. 이런 공포소설의 감성은 뉴위어드의 판타지를 더 이상 도피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없게끔 만들었다.

"동화에 관한 자신의 에세이에서, 톨킨은 위안(consolation)이 동화- 지금은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위안을 주는 판타지라니,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소리다. 독자가 위안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작품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책의 목적이 본질적으로 위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도전하거나 전복시키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이는 안정지향적이며, 미학적으로 완전히 경직된 사고방식이다. 난 그런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판타지는 위안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판타지의 미학을 위안에 저항하는 데 사용한 초현실주의야말로 최고의 판타지다."(각주 3)

아울러, 뉴위어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두 편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는 한국에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삽화가로 더 잘 알려진 머빈 피크가 쓴 3부작 판타지 고멩가스트(Gormenghast) 시리즈로, 그론 백작가의 77대손인 타이터스 그론이 마침내 자유를 찾아 영지인 고멩가스트 성(城)으로부터 뛰쳐나가서 바깥 세상과 맞닥뜨리까지의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고멩가스트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앞의 두 권뿐이기 때문에 사실 고멩가스트 3부작이라는 명칭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멩가스트의 시각적 이미저리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퇴락한 성채와 허물어진 건물들로 가득찬 압도적인 규모의 거대한 성채이자 도시국가인 고멩가스트는, 후일 뉴위어드 계열 작품 속에서 빈번히 묘사되는 어둡고 퇴폐적인 도시들의 원형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M. 존 해리슨의 비리코니엄(Viriconium) 시리즈로, "오후의 문명"이라고만 언급되는 불명확한 시공간상에 존재하는 가공의 도시국가 비리코니엄을 배경으로 삼는다. 처음 이 세계는 잭 밴스의 '죽어가는 지구(the Dying Earth)' 같이 현재로부터 시간상으로 아주 먼 미래처럼 여겨지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도시의 이름마저 경우에 따라 '유리코니엄'이나 '브리코'로 계속 미묘하게 변하는 등 점점 더 모호해지며, 심지어 세 번째 장편 'In Viriconium'에서는 주인공인 화가 오즐리 킹이 작품 속에서 진정한 "현실 세계"로 현대 런던을 그려내는 장면을 통해 비리코니엄의 세계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이는 톨킨 이후의 작가들이 각종 가공의 지도나 연대기 등을 통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견고한 실재감을 부여하려고 애썼던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로, 뉴위어드 특유의 몽환적인 색채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뉴위어드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앞서 언급한 2003년의 논쟁이 처음이었지만, 뉴위어드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은 이미 2000년을 전후하여 상당수 등장한 상태였다. 특히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작가가 차이나 미에빌로, 그는 과학기술과 마법이 공존하는 폭압적인 도시국가 뉴크로부존을 배경으로 한 비참한 모험담 'Perdido Street Station'(2000)를 발표하여 상업적/비평적 성공을 거두며 평단과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이듬해에는 제프 밴더미어가 무수히 많은 버섯들로 뒤덮인 기이한 가공의 도시 앰버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빼어난 단편집 'The City of Saints and Madmen'(2001)을 통해 메타픽션식 전략이나 소설의 암호화 같은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을 도입하는 실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마이클 시스코는 사막의 도시 샌베네피시오에서 죽은 자들의 기억을 헤집어 세계의 근본 질서를 형성하는 언어를 추출하려는 탐색을 다룬 'The Divinity Student'(1999)를 내놓았고, 제프리 토머스는 고도의 과학기술은 물론 러브크래프트적 외계신들과 갖가지 주술이 공존하는, 먼 미래 지구인들이 다른 행성에 개척한 도시 펑크타운을 배경으로 한 단편집 'Punktown'(2000)을 발표하며 SF를 기반으로 뉴위어드에 접근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뒤이어 K. J. 비숍의 'The Etched City'(2003)나 스텝 스웨인스턴의 'The Year of Our War'(2004)가 잇달아 발표되면서 뉴위어드의 서재를 풍성하게 만들었으며, 앤디 콕스가 발간하는 잡지 '더 서드 얼터너티브'와 밴더미어가 편집하는 앤솔로지 '리바이어던(Leviathan)' 역시 이런 계통의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했다.

하지만 영화와 만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확산되며 동시대의 문화적 현상으로 발전한 사이버펑크와 달리, 뉴위어드는 대중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둘 다 본질적으로는 장르의 질적 혁신을 지향한 내적 움직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이버펑크가 분명한 주장과 방향성을 제시한 명백한 운동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뉴위어드는 연속성과 차별성은 갖추되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던 결과(각주 4), 그 파급효과가 상대적으로 미미하여 영향력이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뉴위어드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작풍은 제각각인데,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만한 이데올로그(각주 5)나 선언문(menifesto)(각주 6) 같은 것도 없었다. 더욱이 사이버펑크의 확산의 배경에 깔린 인터넷의 보급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진행이라는, 공시적(共時的) 압력으로서의 과학기술 및 정치사회적 배경도 부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뉴위어드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공산이 컸다. 초창기부터 뉴위어드로 자처했던 차이나 미에빌의 회고에 주목하자.

"뉴위어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굉장히 답답하다. 뉴위어드가 쓸모 없다면, 어설픈 분류체계라면- 좋다, 그 점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보자. 하지만 사람들은 어쨌거나 분류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가 늘 무언가를 분류하려 든다는 점에서, 그런 태도는 다소 이상하다. 이건 지질학에서 딱지를 붙이고 '이것은 이런 종류의 암석이다'라고 하면 끝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문학적 분류는 일종의 도구니까 쓸모가 있는 한 써먹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뉴위어드가 애매모호한 진실 같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던 거다. 그것이 자기 패러디를 반복하면서 무의미해지는 시점이 오자, 그만둔 거고.
갈수록 난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당신들이 뉴위어드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야기들이 웃기다고 생각하든 유용하다고 생각하든 간에, 내가 뉴위어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집어치운 것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중략) ... 잔뜩 힘이 들어갔던 이 영국발 열풍은 2001년에서 2003년까지 지속되다가, 이제 잠잠해지려 하는 것 같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고 주류에서 깨달을 무렵이면, 이미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각주 7)

모든 문학적 운동이나 경향이 그렇듯, 작가들이 문학적 재생산을 거듭하면서 독자들이 처음 느꼈던 충격에 적응하자, 뉴위어드 또한 이제는 초기의 역동성을 잃고 양식화(樣式化)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2008년에 나온 밴더미어 부부의 새 앤솔러지 'The New Weird'의 서문 '뉴위어드, 아직 살아 있나?The New Weird: it's Alive?"에서, 제프 밴더미어는 뉴위어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밴더미어의 서술에 긍정한다면, 특정한 양식을 공유한 문학 운동이라기보다 작가 개개인의 심적 상태에 가까웠던 뉴웨이브와는 달리, 적어도 뉴위어드는 어쩌면 독자적인 하위 장르로 존속할지도 모를 독특한 양식을 유산으로 남긴 셈이다.

"뉴위어드는, 과학소설과 판타지의 요소를 결합시킨 배경에 복잡한 현실 세계의 모형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전통적인 판타지 세계에 대한 낭만화된 관념을 뒤엎으려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차 세계를 다룬 소설의 한 형태이다. 여기에 뉴웨이브나 그 동시대 작가들(은 물론 머빈 피크나 프랑스/영국의 퇴폐주의 같은 선구자들)에게서 받은 영향은 물론, 어조나 문체, 효과를 위해 초현실적 공포소설의 정서적 특성들도 은연중에 들어가 있다. 뉴위어드는 비록 변형된 상태일지언정 현대 세계를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지만, 항상 공공연하게 정치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현대 세계에 대한 자각의 한 형태로서, 뉴위어드는 상상력을 고무하기 위하여 "기괴함에 대한 경도(傾倒)"에 의지하나, 이는 이를테면 늪지대에 세워진 흉가나 남극의 동굴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런 작가의 경도(혹은 신뢰)는 다양한 형태를 띄는데, 심지어 일부는 작품의 실재감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도 차용한다."(각주 8)

뉴위어드는 지금까지 SF에서나 가능했던, 장르의 문법을 전복시키려는 급진적인 움직임을 판타지에서 재현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였다. 비록 탈정치적인 전개로 말미암아 운동으로서의 결집력과 방향성 부족으로 그 성과가 장르 외부까지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채 남겨져 있던 판타지의 또 다른 혈통을 복권시킴으로써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이 장르에 역동성을 불어넣었으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하위 장르가 될지도 모를 양식을 잉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뉴위어드는 죽었다. 다음 위어드여, 번영하라.New Weird is dead. Long live the Next Weird."라는, 다소 씁쓸하게 들리는 밴더미어의 결어에서는, 한편으로 뉴위어드의 성과와 유산이 언젠가 미래의 새 "운동"에 그대로 계승되리라는 자긍심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3. 정거장의 그림자 아래서

본작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은 차이나 미에빌이 데뷔 장편 '쥐의 왕King Rat'에 이어 2000년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으로, 아서 C. 클라크 상과 영국환상문학상 장편 부문을 수상하면서 비평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뉴위어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촉발시킨 작품이다. 전작이 긴박한 전개와 격렬한 전투 장면 같은 장점에도 등장인물에 대한 얄팍한 묘사나 조악한 정치적 입장 표출로 약간 아쉬움을 남긴 것과는 달리, 본작에서는 분량이 대폭 늘어난 만큼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행동이 더욱 여유롭고 깊이 있게 묘사되고 있으며, 정치적 입장 표명 또한 훨씬 세련되어 있다.

특히 등장인물을 구축하는 솜씨가 일취월장한 것이 눈에 띄는데, 야가렉이 그 좋은 예다. 그는 처음에 가짜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가루다 행세를 하다가, 서서히 도시 생활에 적응하며 가짜 날개를 버린다. 갈수록 가루다로서의 자의식을 잃어가면서도, 그는 하늘을 날고자 하는 열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 채 도시와 사막 사이에서 번민한다. 하지만 마침내 원치 않게도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신을 가루다로 규정짓는 마지막 증거인 깃털을 자기 손으로 모두 뽑아버림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고 도시 속으로 스며든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열망으로 시작하여 결국 전혀 다른 존재, 뉴크로부존의 일부로 거듭나는 것으로 끝난 야가렉의 여정에서, 작품 전체에 걸쳐 등장인물이 겪는 내면적 변화는 인물의 외면적 행동 뿐만 아니라 전이(轉移)라는 작품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와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정치성을 표출하는 방식도 훨씬 매끄러워졌다. 경향 문학을 방불케 할 정도의 서툴고 미숙한 정치적 입장 표명으로("나는... 시민쥐다.") 개운치 못한 끝맛을 남긴 전작과는 달리, 본작에서는 정치적 메시지가 작품 전면에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다. 대신 작가의 정치성은, 실전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량학살무기를 사용하고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군부와, 생물무기 프로젝트를 사영화(私營化)하고 범죄집단과의 공조도 서슴치 않는 타락한 시정부, 그리고 그 폭정 아래서 신음하는 뉴크로부존의 인민들에 대한 묘사에 자연스럽게 깊이 스며들어 있다. 특히 자본가-군부-정치가의 연합으로 직조된 뉴크로부존의 권력 지도를 정치학자 C. 라이트 밀즈가 '파워 엘리트Power Elite'에서 지적한 철의 삼각동맹처럼 묘사한 데 덧붙여, 자본가 집단이 재력으로 시정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설정한 대목은 언뜻 최근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인한 시장의 지배 현상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미에빌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작품이 현실 세계의 정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각주 9), 아무리 작품 속에 현실 세계와 유사한 요소들이 등장하더라도 이를 어디까지나 바스락 세계관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작가가 현실 세계로부터 차용(착취?)한 것으로 보는 쪽이 옳은 듯하다. 다시 말해, 독자가 수록에 투하된 토크 폭탄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원자폭탄을, 잇달아 정복 전쟁을 일으키며 제국주의적 확장에 나선 뉴크로부존을 통해 미국을 연상하게 되더라도, 본작이 현실 세계의 근현대사를 은유하거나 풍자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의미이다. 미에빌이 톨킨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렇게 '현실에 대한 은유'로서 작동하는 판타지를 거부했다는 점(각주 10)에서 두 사람의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건 왠지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본작의 번역에는 Del Rey에서 나온 2001년 미국판 트레이드 페이퍼백을 텍스트로 사용했다.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는 맞춤형 일감 소개의 송경아님, 여러 가지 의문점에 유용한 조언을 해주신 김상훈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역자의 졸고를 손보느라 애쓰셨던 아고라 편집부 여러분들께도 깊이 감사한다.

 

각주 1) 현재 게시물은 작가이자 편집자, 평론가인 캐스린 크레이머의 블로그에 옮겨져 있다 (http://www.kathryncramer.com/kathryn_cramer/new_weird/)

각주 2) 대개 뉴위어드 계통의 작가들은 톨킨에 대해 비판적이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제프 밴더미어는 톨킨의 공과(功過)를 평가하는 데 있어 굉장히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Locus October 2002, 'Jeff VanderMeer Interview: Precious Ambergris')

각주 3) Locus March 2002, 'China Mieville interview: Messing with Fantasy'

각주 4) 2003년 논쟁에서 iotar라는 유저가 "뉴위어드는 운동이 아니라 논쟁이다"라고 정의한 것은 아주 타당한 견해다.

각주 5) 그럼에도 미에빌-밴더미어를 과거 뉴웨이브에서의 발라드-무어콕이나 사이버펑크의 깁슨-스털링에 빗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각주 6) "뉴위어드는 평론가들에게나 유용하지 작가들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주제이다. 뉴위어드 선언처럼 어이없고 쓸데없는 짓도 없을 것이다." - 마이클 시스코

각주 7) Locus November 2006, 'China Mieville interview: Fabular Logic'

각주 8) VanderMeer, Anne & Jeff The New Weird(Tachyon Publications): 16

각주 9) China Mieville: RevolutionSF interview (http://www.revolutionsf.com/article.php?id=2391)

각주 10) 몸소 참전했던 1차 세계대전의 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흔적이 '반지의 제왕'에 남아 있음에도, 톨킨은 출판 이후 '반지의 제왕'을 어떤 형태이든지 알레고리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독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http://en.wikipedia.org/wiki/The_Lord_of_the_Rings#Reception)

by 애쉬블레스 | 2009/04/25 00:48 | SF/판타지 | 트랙백 | 핑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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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후속작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이 작품과 관련한 뉴위어드(New Weird)라는 문학 경향에 관해서는 이쪽을 참고.http://ashbless.egloos.com/2300401 ... more

Commented by kisnelis at 2009/04/25 01:41
잘 읽었습니다. 사려던 책이 많았는데 이것부터 먼저 구입해서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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